금강산에 보덕굴이라는 암자가 있다고 한다. 북한에 있어서 지금은 가볼수가 없지만 금강산 관광이 되던때는 가볼수 있는 관광지였다. 금상산이 천하제일 절경이라면 보덕굴 역시 천하제일의 환경건축인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보덕굴을 보고 이렇게 표현하였다고 한다.
"보덕굴은 진실로 진실로 현실 그대로의 이상, 생시 그래로의 꿈같은 광경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든 천교를 빼앗을 인공이 있지 않겠지만 오직 한번 만폭동의 보덕굴에서만 천지조화도 잊어버린 일을 사람이 번듯한 보탬을 하였습니다."
아래 사진들이 금강산 만폭동에 있는 보덕굴 전경이다. 정말 신비롭기 그지없다. 그 옛날 조상들이 저 수직절벽에 저런 절묘한 위치에 저토록 신비롭고 아름다운 암자를 짓다니...
금강산 만폭동 계곡에 오르다보면 집체만한 흔들바위를 예돌아가며 맑고 푸른 물결이 물안개를 일으키는 벽파담이 나오고, 그 위쪽에는 바위벽에서 내리찧고 맡에서 맞받아 퉁기는 바람에 물살이 산산이 부서져 물보라를 일으키는 분담설이 있다. 분담설 오른쪽으로는 준수하게 생긴 법기봉의 뽀족한 봉우리가 호기 있게 솟아 있다. 바로 그 법기봉의 중턱에는 천 길 낭떠러지에서 오직 바지랑대 같은 기둥에 의지해 있는 보덕굴이 있다. 유흥준 교수는 보덕굴은 보면 볼수록 놀랍고 신기롭다고 하였다. 사람이 밧줄을 타고 내려와도 위태로워 보일진대 누각 한채가 장대 하나에 의지해 있다니 본래 법기봉 중턱에 작은 암자를 짓고 그 아래 있는 작은 굴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어느 때인지 그 굴 앞에 누각을 지으니 그것이 보덕굴인 것이다. 7.3m 나무기둥에 구리선을 감아서 아슬 아슬하게 지은 것도 놀라운데 그 가는 기둥에 기와지붕을 얹으면서 눈썹지붕 맛배지붕 팔짝지붕 등을 층층으로 역어 얺으니 멀리서 보면 마치 3층집으로 보인다고 유교수는 표현을 하여 두었다. 이 보덕굴은 1511년도에 지어진 것으로 보덕굴 기등에 씌어있다. 700년전에 이런 모험적인 걱축을 시공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보덕굴은 북한에 있어서 가볼 수 없지만 이와 아주 유사한 구조로 불가사의하게 지어진 암자가 전남 구례 오산에 있는 사성암에 있다고 한다. 아래는 사성암 사진이다.
사성암은 불가사의한 절접으로 금강산 보덕암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사성암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는 곳이라 한다. 사진상으로 보면 금강산 보덕암과 너무나 비슷해보인다.
이 사성암에는 원효스님이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여래입상도 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음각으로 놀라울 만큼 선이 뚜렷하게 보인다.
구례 사성안은 기암괴석과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위치한 암자이며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백제 성왕때에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원효 의상 도선 진각 스님이 수도한 후 4대 성인이 수도했던 곳이라 하여 사성암이라하며 기둥 세개에 의지한 채 바위벽에 제비집처럼 붙어있는 약사전은 바닥에서 법당까지 흙을 채워 절벽을 메우고 공사가 끝난 다음 다시 흙을 파내는 공법으로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고 만든 암자로 구불 구불 돌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면 원효스님이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에약사여래입상이 있다.
금강산에 있는 보덕암자랑 모습이 너무나 비슷하다.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고 그 옛날에 이런 신비로운 건축물을 지었다는 것이 오늘날 생각하여 보면 불가사의해 보인다. 특히 저런 건축물을 지을 생각을 한 역발상의 안목에 놀라울 뿐이다.
1500년대 지어진 보덕굴과 800년대 지어진 사성암을 보면서 우리는 불가사의한 신묘함에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건축물이 일본에도 있다고 한다.
일본 교토의 청수사란 절의 법당 무대가 이와 유사한 구조로 지어져 있다.
교토에 있는 청수사 무대누각은 1560-90년대 재건된 건축물이라 한다. 3대쇼군인 도쿠가와 이예야스의 후원으로 재건된 절이라 한다. 경주가면 불국사를 보지 않고 보았다고 할수 없듯이 교토에 가면 청수사를 보지 않고는 교토를 보았다고 할 수 없는 명소라고 한다.
소설 대망에 보면 오다 노부나가가 적들과 싸움하는 전투신 중에 교토에 있는 중(승병)들 수천명을 몰살시켜버리고 그 절도 초토화시켜서 흔적도 없애 버린다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실제 있은 일로 그 절이 바로 교토 인근에 있는 연력사이다. 노부나가가 죽고 덕천가강(이에야스)이 쇼균이 된후 연력사는 후에 재건이 되어서 오늘날 외형이 축쇠된 상태로 연력사는 남아 있다. 그 중들과이 싸움에서 청수사도 다시 불타버리나 어예야스에 의하여 제건 후 이후 몇차례 중건을 거친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청수사는 본래 절집이 들어앉기에는 부적절한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이 절은 지은 건축가는 본당을 앉히면서 벼랑의 가파름을 역으로 이용하여 무려 139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넓은 무대를 설치함으로써 본당을 지었다. 이로 인하여 깊은 산속의 아름다움에 넓게 트인 호쾌한 전망을 모두 절집으로 끌어들여 청수의 무대라는 전설을 낳은 것이다. 청수의 무대는 이를 떠받치는 나무기둥들이 못하나 사용하지 않고 전후좌우로 견고히 조합하여 있다는 인공의 공교로움 때문에 더욱 감동적이다. 자연지형이 가치를 극대화한 건축적 사고를 하였다는 점에서 한국에 있는 보덕굴과 사성암과 일맥상통한다.
오늘날 하나의 전설이 된 청수의 무대는 백재계 도래인으로 일본 장군이 된 다무라마로가 790년대에 지은 절이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 인한 절묘함으로 전설로 불리던 청수의 무대는 하극상의 시작을 만든 1461년도 오닌의 난때 전부 소실되었다. 그 잿더미에서 흥복사 스님중 한 분이 16세기 초에 덕천가강의 지원하에 원형에 충실하게 재건한 것이 이후 화재로 한번 더 재건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 한다.
1000년도 더 전에 지어진 사성암과 700년전에 지어지거나 재건된 보덕굴과 일본 청수무대는 자연과 인간의 건축적 미학이 교묘히 결합하여 오늘날 불가사의한 건축물로 인식이 되면서 모두 관광명소가 된 건축물들이다. 수천년전에 고대인들이 수직절벽의 깎아지른 비탈에 저런 건축물을 지었다는 것이 어찌 가능하였으며, 그러한 건축구조를 상상하고 지었다는 것이 하나의 전설이 되고도 남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공교롭게도 이런 건축물이 남한과 북한과 일본에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다는 것도 우연속이에필연도 감지가 된다. 청수사를 지은 이가 백제계 도래인이고 원효가 머무르던 사성암도 통일신라 말기이기에 시기가 비슷하며, 그 시대 장인들의 건축적 사고가 두 건축물에 담겨져서 만들어져서 한국 일본 두개의 건축물에서 비슷한 감정을 우리가 느끼는 것은 아닐가 하고 상상하여 본다.
보덕굴 사성암 청수무대를 보고, "전설은 그냥 이루어진게 아니었네!"라고 생각하여 본다.
요새 파생시장의 연일 폭등하는 콜옵션의 가격도 마치 외금강 절벽에 신비롭게 세워져 있는 보덕굴 누각을 보는 것과 유사한 감정이 느껴진다. 신묘로운 급등 시세가 현실로 만들어 짐을 보고, 그리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우연 속에 필연이 있는 것은 아닐가 하고 생각하여 본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후에 이유가 알려지면 비로소 우리는 "전설은 그냥 이루어진게 아니었네!하고, 현재 상황을 복기하면서 파생미학을 감상하게 될 듯하다.
잔남 구례의 절벽에 세워진 사성암과 바다 건너 일본 교토의 청수사 무대 속에 백제인의 건축적 미학이 동시에 느껴지는 감정이 우연속에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여하튼 콜옵션의 대시세는 만들어 졌다. 아찔한 절벽을 타고 우뚝 솟은 천해절경의 절집을 구경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신묘롭고도 폭발적인 연속적 시세가 만들어 졌다. 추가적으로 더 만들어질지 어쩔지는 지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