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년 전 본장 이층 1번
홈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인 채로 내 눈에 포획이 된 것이다. 베이지색 치마에 베이지색 브라우스..... 큰
눈에 검은 단발머리.... 계란형의 얼굴에 안타까울 정도로 창백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 년은 요망한 계집이고
잡년이다.
만일 님들이 이 년을 보게 되면 그녀의 쓸쓸한 얼굴에 현혹되지
말고.... 그녀의 은근한 유혹에 마음 들뜨지 말라..... 남자라면 한 번은 갖고 싶은 아름다움을 가진 이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는
순간 당신의 삶의 일부는 파괴 될 수 있다... 자칫하다간 삶의 일부뿐 아니라 삶 전체가 끝장이 나버릴 수 있다. 내 기억을 더듬자면
그녀는 남자를 쏘는 사냥꾼이다. 남자로써는 피해나기 어려운 남자를 쏘는 사냥꾼.....
이 여자는 사년전 그 때도 혼자였고....오늘도 혼자였다.... 우울한
얼굴에 마판의 아편 따위는 관심도 없어 보인다. 왜 이런 여자가 마장에서 혼자 있을까....? 이리도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서있는
것조차 힘이 드는 듯 벽에 몸을 의지하고 혼자 있는 것일까....? 사년 전 그녀가 우리 무리 한 편에서 그렇게 나타났을 때 나는 그녀의
그런 안쓰러운 모습에 마장의 아편이 제대로 되지 못할 정도였다.
내 눈은 끊임없이 그녀를 따라 다녔고....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서 나의
관심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따금씩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내 눈을 피하는 법도 없이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예뻣고.... 그녀를 향한 내 근질근질한 잡놈의 근성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접근 첫 날.... 나는 아예 경마를 포기하고 그녀에게
접근했다. [혼자신가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경마를 안 하시는 것
같은데....?] 여자는 예쁘게 보조개를 만들며 웃었다. [전 경마는 몰라요?] [모르면서...?] [제가 아는 사람이
경마에 도통한 사람이 있거든요....] [....] [그 사장님이 몇 마리 말을 뽑아 주면서 연식만 사라고
해서요....] [....!] [그러면 사채를 하는 것보다 낫다고....]
나는 어처구니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연식만 하시는
건가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마권 두 장을 내게 내 보인다. 삼 번에 연식 두 장..... 삼번은 들어왔고....연식 배당이
1.8배이니 십육 만원을 딴 셈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들어왔기 망정이지 안 들어 올 경우
연식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타격이 커요.] 여자의 음성이 자랑스럽게 변한다. [거의 다
들어오던걸요....] [....!] [그 사장님이 불러 준 말에 연식만 해서 꽤
괜찮았는걸요....] [.....!] [어차피 장난인데요 뭘....재미삼아 해보는 건데 돈 몇 백 잃는다고 뭐
어때요...]
나는 놀라지 않을 수없었다. 장난으로 재미 삼아 하는
것이라고....? 돈 몇 백 쯤 잃어도 상관없다...? 당신이 그렇게 돈이 많은 여잔가? 나는 비웃어 버리려다 말고 정중히
물었다. [꽤나 돈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 [우리들은 돈 몇 백에 죽고 사는
놈들인데요.] [....] [무슨 사업하고 계신가요?]
여자의 눈빛이 은밀해 졌다. [알고
싶으세요?] [예....] [전 사채를 하고 있어요...잠실에서 사채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죠...] [...!?] [직원
열 명을 두고요.]
두 번째 날..... 나는 우리 무리들과 마장을 향하면서 그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잠실에서 큰 사채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직원만도 이십 명이 넘는다. 나는 열 명에 열명을 더해
그녀를 신격화시키기 시작했다. 돈이 엄청 많아서 돈 몇 천 쯤 잃어도 꿈쩍도 않을 여자다. 그 외에도 그녀를 신격화시키기 위해 나는
우리 무리들에게 그녀에 대한 이런저런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내 말은 적어도 우리 아편 무리들 사이에서는 신용이 있었으므로 곧 그들의 가슴에
불을 당겨놓은 꼴이 되고 말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잡놈 패거리들 중에는 이미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그녀의 주위에서 얼쩡거리며.... 그녀와 몇 마디 말이라도 건너고 나면 무슨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으쓱대곤
했으니까. 아무튼 나 또한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오늘은 기필코 그녀와 커피라도 한 잔 나누고 말리라. 마장의 이백원짜리(지금은
백원) 커피가 아니라 마장 밖의 삼천원짜리 커피를.... 다른 잡놈들이 이 여자를 채가기 전에 내가 손을 써야 한다. 그 날 내
각오는 남달랐다.
그 날도 어김없이 그녀는 나타났고 나를 향해 활짝 웃어 주었다. 조짐이
좋다. 저 여자도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은근한 자랑스러움이 나를 들뜨게 했다. 3경주가 끝나고 나는 그녀에게
접근했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예....] [마장의 커피가 아니라 밖에서....] 여자는 웃으면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우리 둘은 비밀리 아편장을 빠져 나왔다.
달리는 차 속.... 그녀에게 물었다. [아이는 몇
인가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죠...]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 (그렇다면 혼자 사는 여자란 말인가?) 나는
갑자기 그녀가 두려워졌다. 혼자 사는 여자는 남자를 알게 되면 그 남자를 독차지 하려는 욕심이 있다. 그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는 경험해 보지 않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는 그녀로부터 마음으로 한 발짝 물러서면서
물었다. [독신인가요?] 그녀는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결혼이야 했었죠....속아서 한 결혼....] (속아서 한
결혼...?) [남편이란 작자는 결혼 전부터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어요....지금도 요양원에 있구요...] [....!] [병
치닥거리도 이젠 신물이 나네요...이런 이야기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더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그만 두었다. 쓸쓸히
차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가 너무 안돼 보였기 때문이다.
차가 남태령을 넘어 공사를 하다 중단한 우성아파트 옆 환승주차장에
멈추었다. 건너편에 솟아있는 호텔을 방불케 하는 모텔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나는 그 때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원하는
것은 커피도 술도 그 어느 것도 아닌 아늑한 모텔의 객실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 그녀의 은근한 바램이 나를 더욱 불안으로
휘몰아 갔다.
이 여자... 혹시 꽃뱀이 아닌가? 나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 그때부터 나는 이 불편한 자리를 어떻게 피할 것인지에 온 신경이 모아졌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었다.
----예...방사장님... 내일 입금해 드릴께요. 제 돈만 써 주시는 사장님이까 특별히 이자는 3부로 해드린
거예요.
그녀는 백을 열었다. 큰 공책에 견출지가 빽빽히 붙은 한 페이지를
열었다. 방사장이라고 써있고.... 그녀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으로 확인하듯 짚어가며 말한다. [그러니까....이번 5천까지 하면
총 일억삼천이네요....] 나는 그녀의 사채 공책만으로도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으며 정말로 큰 사채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
버렸다.
그래도 나는 그녀가 두려웠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혼자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독신녀니까.... 내 가정을 위해 좀더 그녀를 살펴둘 필요가 있다. 오늘의 태도로 보아선 이 여자는 내가 원하면 언제든
은밀한 곳으로 데려갈 수 있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나는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시원하게 소변을 갈긴 후....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도
통화중인 그녀가 볼 수 있도록 헛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야! 갈께...! 기다리고
있어!
나는 헛 전화를 끊고 차에 몸을 실었다. 나의 바쁜 태도에 큰 눈으로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예...아들놈이 갑자기 쓰러졌다는군요...죄송합니다...빨리 집에 가봐야
겠어요...] 여자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보세요...저는 여기서 내릴께요...전철을 타면
되거든요....] [그러시겠습니까?] 여자가 차에서 내렸고, 나는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
내 손에는 그녀가 건네 준 그럴 듯한 명함 한 장이 있었다.
0000파이넨스 대표 000
이 명함은 가일층 우리 내
잡놈 패거리들의 가슴에 불을 당겨놓은 꼴이 되었다.
삼일 째..... 나는 그녀를 의도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명쾌하지 못한 것이 그녀로부터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를 쫒던 과녘이 옮겨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내 잡놈 패거리들 중에 아랑드롱을 뺨치는 건달 형이 한 명
있었다. 짙은 눈썹에 훤칠한 키.... 여자들을 향해 눈웃음을 치면 여자들이 오줌을 질금거릴 정도의 미남인 형..... 노래
솜씨도 보통을 넘는....한 때는 가수가 꿈이기도 했던 형.... 우리 동내 한 음식점 여주인은 그 형과 하룻밤만 잠을 자 봐도 원이
없겠다는 얼빠진 여자가 있을 정도로..... 그녀의 화살을 메긴 화살의 과녘이 바로 그 형에게 옮겨진 것이다. 둘은 식당에서 다정히
음식을 먹기도 했었고....커피를 마셨으며.... 허공에서 섞이는 두 사람의 눈빛이 남다르다는 것을 촉 좋은 내가 간파해 낸
것이다. 어느 날.... 나는 형에게 기습했다.
[형 그 여자 조심해.....] [누구 말이냐?] [경마장 그 여자
말이야?] 형이 웃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정숙씨....그 여자 대단한 여자야....돈이 엄청나게
많아....] [....] [사채를 이십억 이상 굴리고 있다니까...이자가 최하 삼부래....] [....] [밑에
진상치는 애들을 데리고 있어서 돈 뜯길 일이 없대...밑에 있는 김부장이라는 사람이 장안에서 알아주는 진상꾼이라는
거야...] [....] [생각해 봐라....이십억에 삼부만 잡으면....한 달에 육천만원....] 마치 자기 돈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는 형이 가소로워 일침을 놓았다. [그 여자가 얼마나 돈이 있든...얼마를 벌든...형하고는 하등에 상관이 없는 일
아니야...] 나의 말을 짓이기듯 형의 자랑이 절정을 이루었다.
[그 돈이 내 돈....내 지갑이 될 수도 있는 일
아니냐...] [....!] [그 여자가 뭐랜 줄 아냐?] [....] [나더러 운전을 배우라고 하더라....남자가 차도
없이 뭐하는 거냐고....내가 면허증만 따면 최고급승용차를 사준다고 했다니까...] [....!?] [그래서 어제 나 운전면허 딸려고
학원에 등록했다.] 나는 놀래서 물었다. [그 여자하고 갈 때까지 간 거야!] [짜식....그걸 말이라고
하냐....!] [.....!] [나한테 걸려들어서 온전한 여자 봤냐?]
마요일을 열 번 쯤 뛰어 넘어..... 나는 소문 하나를
접수했다. 형이 옷가게를 처분했다는 것이다. 형은 비록 건달이었으나 형수는 예쁘기도 했었지만 생활력이 강한 여자였다. 상냥했고
화를 낼 줄 모르는 형수였으니 당연히 옷가게는 단골손님이 많았고 꽤나 수입이 좋은 가계였다. 그런 옷가게를
처분했다니....!
언젠가부터 형은 마판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고..... 동내
하우스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물론 형은 그 여자와 미쳐서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고.... 그런 형을 짐작하고 있었던 나인지라
형의거취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옷가게를 처분했다니....!
나는 소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어서 형에게 전화를
때렸다. 내가 사실이냐고 묻자 형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나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라는 법 있냐? 나도 사채사업 한
번 해봐야 쓰것다. 나야 뭐 아직 경험이 없으니까 우선은 정숙씨 도움을 받아야지 뭐. 가계 처분한 돈하고....전세 돈 사글세로 돌린
돈하고.... 여기저기서 긁어모으니 한 일억 되드라....
---일단은 그 돈 정숙씨한테 맡겼다. 월 5부 이자는 보장해
준다드라.... 내가 그 일 배울 때까지 그 이자를 챙겨 준다니 얼마나 고맙냐?
나는 화가 나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너무도 들떠있는 형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다만 전화를 끊으면서 이 말만은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으리라.... 나는 느닷없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는 뜻 밖에도 옷가게 형수로부터의 전화였다. 집으로 잠간이라도...아주 잠간이라도 와줄 수
없겠느냐는.... 전화 속에서 드려오는 형수의 음성에는 울음이 담겨 있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간절한 바램을 담고
있었다. 나는 거절할 수 없었고...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나는 형수 집으로 달려갔다.
열 두자, 열 석자의 단칸방에 살림으로 빽빽이 쌓여 있는 방에 형수가
혼자 있었다. 이미 빈 소주병 둘에....반쯤 비워진 소주병 하나.... 안주는 배추김치 하나만이 이상한 울림으로 덩그라니
놓여있었다. 그 예쁜 형수의 얼굴은 얼마나 울어댔는지 퉁퉁 부어있었고.... 산발한 머리는 울고 있는 형수의 얼굴을 반쯤은 덮은 채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형수는 서있는 나를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소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나 오늘 준철이 아빠와 이혼 했네요...] 눈물을 섞은 형수의 음성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도 놀라서 할말을 잃고 있는 나의 귀로 눈물 젖은 형수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어쩌면 남자들이 이럴 수
있는 거죠?] [....!] [세상에 어쩌면...어쩌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형수의 얼굴엔 처참한 분노와 눈물이
뒤섞여 미친 여자의 혼돈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준철이 아빠를 붙들어 보려고 준철이와 법원 앞에서 그 작자를
기다렸네요.] [...!] [택시에서 보란 듯이 그 작자와 사채를 한다는 여자가 나란히 내리는 것을 본 순간 내 눈에 천불이
났네요.] [나도 모르게 그 여자 머리카락을 붙잡았죠.] [그때 내 눈에 불이 번쩍이더라구요.] [그 작자가 내 뺨을 후려갈긴
거죠.] [준철이가 보는 앞에서....] [몇 대를 그렇게 계속해서 얻어맞고 얼판에는 쥐세끼처럼 비참하게 바닥에 나가
떨어지고....] [보다 못한 준철이가 그 작자에게 덤벼들며 악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형수가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세상에...착하기만 한 형수를.... 아무리 그 여자에게 정신이 나갔기로서니 아들이 보는 앞에서... 그 여자가 보는
앞에서 형수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평생을 노름판에서 건들거리면서 이 여자 저 여자 기웃거리며 살던 형이.... 묻지마
관광이란 관광은 단골로 찾아다니던 형이.... 집 안의 세간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도 모르는 체 자기만 즐겁게 살면 되는 거라며 으스대듯
형수의 희생을 딛고 살았던 형이.... 자식들을 위하여....형을 위하여.... 그렇게나 묵묵히 소처럼 일만 했던 형수를 그토록
비참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형수는 잔을 계속해서 비웠고... 그런 형수를 나는 말릴 수가
없었다... 형수의 얼굴로는 술취한 눈물이 범람하듯 흘렀고....처절한 넋두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 순간 맹서를 했네요...이혼
하기로...] [준철이를 데리고 한 번은 사정해 볼 요량이었는데...그 순간...그 작자를 포기했네요.]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네요....포기하지 않을 수.....] 이 처참한 상황에서도 형수의 음성에서는 형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연민이 남아
있었고....떠나보낸 남자에 대한 괴로움이 남아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이 순간에서야
형수가.... 그것도 술이 취한 채로 나를 부른 이유를 희미하게나마 알수 있었다.
포기했다고 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한 아픔을 이겨내지 못한
채로.... 나로 하여금 형을 만나 한번만이라도 형수를 대신해 사정해 달라는 그 애닯은 하소.... 비록 말로 나를 붙들고 애걸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충분히 갈기갈기 찢기는 마음으로 울고 있는 슬픈 하소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만 눈물이 핑그르르....돌고
말았다..... 어찌하여... 도판을 서성이는 남자들의 아내들은 왜 이토록 가엾기만 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 날 이후로는 형을 볼 수가 없었다. 형의 핸드폰 번호도 바뀌어
있었고....그 여자의 핸드폰 번호도 바뀌어 있었다... 잠실에 있다는 그녀의 사무실은 이미 어떤 건설사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으므로 형을
찾아 사정해 볼 기회는 전무해저 버렸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형수는 동네 음식점 서빙을 하면서 힘든 생활을
해갔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은 초췌해졌고, 그런 형수를 바라보는 내 마음 또한 편치 않았다.
그런 형수에게 남자가 생겼다. 서빙하는 음식점 반대편에 위치한 금성(지금은
L.G)전자 대리점 사장이 그 주인공이 되었다. 나는 한 편으로는 그렇게 망가져 가는 형수가 서운했으나 그것은 누구도 형수를 탓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형수는 애인이 있다는 꼬리표 하나를 달고 서빙 일에도 손을 떼었다. 그 이후.... 형수에 대한 좋지 않는
소문들이 간간히 들려오기는 했으나 내가 형수를 직접 본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제주 교차경주가 막 끝나고 사당동점 삼층에서
그 여자를 보았다. 마땅히 같이 있어야 할 형이 그 여자 옆에는 없었다. 간간히 소문에서 들었던 것처럼 형은 알거지가 되어 그녀와
결별했다는 사실이 확인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혼자서...그녀 혼자서.... 내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그 때처럼 벽에다 몸을 걸친 듯
힘없이 그녀가 서있었다. 그 우수에 젖은 얼굴로..... 안타까우리만큼 병색이 짙은 파리한
얼굴로....
그렇다. 그녀는 분명히 또 다른 먹이 감을 구하기 위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그녀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힘없는 시선이 운명처럼 내 얼굴을 향했다. 순간적인 눈빛의 흔들림이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언제 나를 보았느냐는 식의 냉정함이 깃들었다. 그 표정 그 눈빛에서 내가 자칫 서툴게 굴다간 큰 창피를 당할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화장실에서 소변을 해결하면서 칠층에 우글거리고 있는 원정군들을 향해 핸드폰을
때렸다. 삼층으로 와 달라는.....
그러나 그녀는 내가 소변을 해결하는 사이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경마는 엉망이 되었다. 전 층을 뒤지고....또 뒤지고..... 일요일 날 내 아편은 결국
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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